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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리우올림픽을 보도하는 미디어의 태도 유감
쫑블리
8월 5일(한국시간 6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 주경기장, 그 곳에서 올림픽의 막을 올랐다. 이번 올림픽은 ‘새로운 세상’을 뜻하는 ‘뉴 월드(New World)’를 그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그렇지만 국내 미디어의 올림픽을 향한 시각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제3세계 국가에 대한 무성의와 편견, 뿌리깊은 여성혐오적 문화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MBC 개막식 중계부터가 그랬다. 각국 대표단의 입장과 함께하는 자막은 ‘남아프리카공화국-넬슨 만델라와 다이아몬드’, ‘캄보디아-앙코르와트와 메콩강’, ‘이집트-고대 이집트 문명, 수에즈 운하’ 등 사회과 부도나 시사 상식 백과에서 인용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나라’, ‘오랜 내전을 겪은 나라’ 등 해당 국가에 대해 비하의 소지가 있는 표현들도 전파를 탔다. 입장을 바꿔놓고 어느 나라인가에서 한국에 대해 ‘여름철마다 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보는 나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한 나라’와 같이 소개한다면 결코 적절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결국 중계방송이 제3세계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반복하고 있다고 느꼈다.
성차별적 인식은 어떨까? 개막식이 있은 지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도 벌써 적지 않은 수의 성차별 발언이 튀어나온다. 전기영 SBS 유도 해설위원은 8월 6일, 여자 유도 -48kg 16강전에서 베트남의 반 응옥 투 선수의 경기를 해설하며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스물여덟이라면 여자 나이론 많은 나이거든요.”와 같이 운동경기에 불필요한 발언을 했다. 또 최승돈 KBS 아나운서는 여자펜싱 에페 개인전에서 “무슨 미인대회에 출전한 선수처럼”이나 “서양의 양갓집 규수의 조건을 갖춘 것 같은 선수네요.”와 같이 말했다. 전기영 해설위원과 마찬가지로 운동경기에 불필요할 뿐 아니라 여성을 대상화하고 성별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부적절한 발언이라 생각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올림픽 달굴 미녀스타들”, “인기는 이미 금메달, 리우에 뜬 국민 여동생들”과 같이 경기와 상관없는 여성 선수들의 외모를 품평하는 신문 기사들은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물론 외모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거나 감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원치 않는 대상에게 전하거나 공적인 매체에서 표현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크다. 여성의 주체성과 능력을 무시하고 오직 외모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않다. 선수들은 미인대회에 출전한 것도 아니며 해당 기자들 역시 미인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들을 여과 없이 내보내는 언론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싶다. 물론이 같은 언론의 행태는 타인의 외모에 대해 쉽게 평가하고 함부로 얘기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생각들에 대한 사회적 제재가 미약한 한국사회의 반영이겠지만 말이다. 미디어는 현대인의 시선을 온통 붙잡고 있는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의 컨텐츠를 생각할 때 오늘날의 사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주체이다. 그런 점에서 더더욱 방송사와 언론사의 둔감하고 나태한 보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고 이를 유지하므로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친다.
<렛미인>, <화이트 스완>과 같은 성형수술 홍보 프로그램이 버젓이 방영되는 한국과 달리 2005년 프랑스는 성형광고를 전면 규제했고, 2012년 영국은 미용성형외과의사협회에서 성형광고 전면규제를 요구했다.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이 구체적인 제도적 실천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프랑스 방송법의 “남녀 재현 평등성 측정 기준” 도입, 네덜란드, 노르웨이, 뉴질랜드, 덴마크, 독일 등 세계 각국의 ‘국적, 성적지향, 신념, 인종, 종교’ 등에 근거한 증오 발언(Hate Speech) 처벌 규정은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추구한다.
앞서 언급한 제3세계에 대한 협소한 인식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외국인들에 대한 비하나 멸시로 이어지기 쉽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존재하는 숱한 여성혐오적 문화는 최근 그 문제의 심각성이 사회적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러한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합의와 개선의 의지가 필요하다.
정치적인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은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 갈등과 분열의 불씨에 미리 대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건강한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한다. 미디어가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유념하고 지금보다 더 사려 깊게 보도한다면 2016년 한국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여성혐오’를 둘러싼 게으른 오해와 번지 수를 잘못 찾은 억울함도 조금은 그 탈출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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