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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또바기)


같은 날 발행된 같은 지면의 두 사설이 입장이 대립하는 신문을 생각해 봤는가. 상식을 넘어 상상 밖의 문제일 것이다. 2011년 6월 발행된 <건대신문> 1255호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학생 데스크 3명 중 한 명이었던 나는 우리가 작성한 사설맞서는 사설을 작성한 주간교수를 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편집실에 나타난 주간교수는 발행일 자정이 넘은 시각까지 우리와 대립했고, 타협책으로 ‘두 개의 사설’을 제안했다. 어찌 되었든 두 개의 사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주간교수는 자신의 논리를 굽히지 않았다. 그가 이야기했던 논거가 바로 중립성과 불편부당성이었다. 언론이 한 입장을 선택하여 주관성을 드러내는 것은 저널리즘 원칙에 맞지 않다는 말이었다.


진실을 가리는 중립성 원칙의 역설


주간교수는 D 일간지의 전 부국장,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정부가 부검감정서를 조작하도록 강압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폭로한 기자였다. 이런 사람이 상식을 파괴하면서까지 불편부당성을 지키고자 했다면 한편으로는 참 존경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학생 편집국의 일원으로써 느끼기에 그것은 진실을 가리고 독자를 우롱하는 행위였다.


‘두 개의 사설’의 소재는 당해 건국대의 <조선일보>-QS 대학평가 순위 하락이었는데, 보직교수의 회의체인 교무위원회 위원 전원이 사직서를 제출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전년 대비 한 계단 떨어지면 대학은 통상 무시하거나 해명자료를 내놓으나, 역으로 집단 사직서가 나온 것이다. 주간교수는 고립된 아프리카 미인이라도 세계적인 미인이 되려면 외부의 평가기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비유를 들어, 대학도 평가 하락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적었다.


실제로 문제를 취재했던 우리는 그 평가가 공신력이 의심받는 지표였음은 물론, 당시 건국대 사회에서 연간 논문 편수 규정을 두고 공개적으로 벌어지던 교수사회와 대학본부의 갈등 속에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대학본부의 정무적 판단이라는 심증도 있었다. 


더군다나 주간교수는 KU미디어센터장 겸 언론대학원장인 보직교수로써 사직서를 낸 당사자이기도 했다. 학생 데스크인 우리는 팩트(Fact)에 대해 직접 제시하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서 원론적인 문제만 지적하는 것으로는 독자들이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메디아티 박상현 이사의 주장은 기계적 중립주의에 지나지 않다 


사람들은 사설을 비롯한 오피니언을 두고 언론사 고위직들의 주관적인 생각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논리가 엇나간 사설과 기명 칼럼을 해당 언론사의 성향과 이데올로기로 규정해 조롱하고 비웃는다. 이런 조롱 중에는 간혹 언론은 객관적이어야 하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이는 한국 언론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우리 언론들은 한결같이 홈페이지에 게시한 사시를 통해 한국 언론의 정파주의를 자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객관, 공정, 불편부당을 금과옥조처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보도를 위한 방법인지, 아니면 그 자체가 목적인지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메디아티’의 박상현 이사가 JTBC의 정유라 체포 소식 보도를 두고 기자가 소위 ‘불가근 불가원’ 규범을 어겼다고 지적했다. 야생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사람들이 자연 현상에 개입하지 않듯이, 카메라를 켠 상태로 정유라를 신고한 것은 사건에 대한 명백한 개입이며 직업 전문성을 훼손했다고 적었다. 즉 스스로 사건 당사자가 되면서 독립성을 포기하고, 객관성과 중립성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박상현 이사의 주장대로라면 2011년 주간교수는 사건 당사자로서 사설을 작성했으므로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학생 데스크인 우리도 잘못한 것이 된다. 사설을 통해 사건에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비판 당사자이자 취재원을 상대로 언쟁을 벌이고 기사를 써 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간교수의 사설처럼 원론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사설을 쓰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처럼 현장 속에서 기계적으로 중립주의를 엄밀하게 따져 묻는다면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역설이 일어나게 된다.


기자의 1차적인 존재 사명은 시민을 위한 진실보도


사실 객관성과 불편부당성은 언론의 사명과 목적이 아닌, 진실을 위한 방법론이었다. 1920년대, ‘황색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지독한 정파주의를 겪으며, 왜곡보도가 팽배하던 미국 언론을 비판한 언론인 월터 리프먼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철저히 훈련된 과학적 취재, 보도 방식-실증주의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합리성, 현실의 정확한 반영, 경험적 관찰보도로 전제되는 진실에 대한 추구가 전제되어야 한다.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의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은 “사실 확인의 규율이 없으면, 중립적 목소리는 허공을 덮는 투명 막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유선영(1995)의 ‘객관주의 100년의 형식화 과정’을 보면 “한국에서 객관주의는 총체적인 사실에 대한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입장의 유지가 아닌 선택된 개별 사실에 집착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이용, 상업화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한국 언론계는 그동안 객관과 중립을 포장하여 자신을 방어하고, 독자와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정치적, 직업적 책임을 외면해왔다는 지적이다.


이 관점에서 JTBC의 정유라 체포 보도를 다시 생각한다면, 이번 보도는 칭찬해야 마땅하다. 상업주의 관점에서 정유라에 접근했다는 사실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지적할 부분은 없다. 취재팀은 취재 과정을 페이스북을 통해 생생히 공개하여 독자들과 소통했다. 


독자의 제보로 정유라의 소재지를 파악하고 결국 공공의 이익을 달성해 냈다. 이는 기자가 시민이기 때문에 시민으로써 정당한 행위를 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한걸음 더 들어가 시민의 정치, 사회 참여를 위한 진실을 보도하는 언론의 본질을 성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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