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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당신들의 권력을 생각하라

한결또바기 2017. 1. 2. 04:31



김정현(또바기)



“(문예지) 편집위원이 되고 나니 그 모든 추근거림이 갑자기 사라졌다” <문학동네> 강지희 편집위원의 말이다. 문학계는 작년 표절, 올해에 ‘#OOO_내_성폭력’ 움직임의 한 가운데에 놓였다. 사람들은 저 공간이 썩었다고 말한다. 강지희 편집위원은 권력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것은 문학계의 폐쇄적 권력구조일수도 있지만, 사회 전반의 젠더 권력일수도 있다. 사람들은 ‘문학계의 기형적인’ 권력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해시태그가 넘실대는 SNS 상에서 논의는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해시태그는 곧 댓글 사형 집행대가 되었고, 해시태그 공장 안에서 전체 공개로 가공되어 “야 OO들 썩었네.”로 끝난다.



해시태그는 폭로인가, 공론화인가. 혹자는 SNS를 인민재판의 장이라고 말한다. 자고로 아렌트와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요건을 ‘숙의’라고 말했다는데, 어느 타임라인에 심사숙고가 있으며, 생산적인 토론과 합의가 있느냐고 말한다. 적어도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려는 기준이냐 있느냐고 말한다. 일견 일리가 없지는 않다. 해시태그 운동이 나의 피해를 구제하여 달라는 호소라는 점에서 폭로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우리도 SNS를 고민과 토론의 목적보다, 내 스트레스를 씹을 안주거리 시장으로서 삼고 누군가의 울부짖음을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모든 폭로는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간과해온 지점은 해시태그에 몸을 실은 사람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마치 군대에서 발견한 간부의 비리나 자신이 당한 성추행을 군 검찰에 고발하기를 주저하듯이, 문단도 그런지 따져보고 해시태그를 비판해야 한다. 다른 업계라고 다를 것은 없다. 피해를 호소하는 자가 갈등을 해소하고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는 다른 합리적인 창구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권력과 억압 아래에 놓인 한 개인이 의지할 공론장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 사람이 “#공론화”라고 말한다 하여 법정에 가서 떠들라고 한다면 이는 잔인한 일이다.



오히려 비판해야 할 곳은 해시태그가 아니라 그것이 보여주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2014년으로 돌아가면 전 국회의장이 골프장 캐디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같은 시기 저명한 음대 교수가 만 18세부터 22세까지 여학생 4명을 성추행하여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딸 같아서 그랬다”고 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2004년 여성학자 권인숙의 논문 <군대 내 남성간 성폭력과 남성성>에는 성추행을 당한 후임병의 입에서 “고참 입장에서 귀여워서 친밀감을 표현했다”는 말이 나온다. 더 예전으로 들어가면 권인숙 자신도 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당사자, 공권력이 자행한 성범죄의 피해자다.



권력은 나는 순간부터 왜곡될 수밖에 없다. 권력 아래에 있는 사람을 내가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주 사회라면 권력이 정당하게 사용되도록 권력자가 끊임없이 감시 받고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그것은 어떤 공간이든, 어떤 관계이든 마찬가지다. 해시태그에 오른 가해자의 아랫도리에 권력이 오를 때까지, 염증이 곪을 때까지 방치해 온 우리가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 생물학에서 만성적인 염증은 암의 원인 중 하나로 본다. 해시태그의 시간은 “OOO들 썩었다”며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권력을 다시 생각할 골든 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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