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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1.17Km라는 거리

한결또바기 2017. 1. 2. 02:08

1.17km라는 거리. 가장 최근의 시위도 가장 가까운 거리가 아닌, 왼쪽의 큰길을 통해 이뤄지고 있어 실제 거리는 더 멀다. ©️ 네이버 지도




김정현(또바기)


1.17Km. 광화문에서 청와대까지의 거리다. 11월 12일, 이 거리는 우리가 내지른 함성이 날아가야 하는 거리였다. 우리는 그날 처음 채팅 방에 모였다. 하나는 보수 언론의 신입 기자요, 또 다른 사람은 국내 최고 엔터테인먼트사 사원이며, 로스쿨 학생에 회사원이 있었다. 우리는 그 중 한 사람과 면식이 있다는 것 외에는 터럭 하나같은 게 없었다. 단지 하나 청와대로 가서 “박근혜 앞에다 소리 한 번 지르고 싶다”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우리 방의 공지글은 “청와대를 까부수자”였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들인데, 오늘만큼은 끓어오르는 혈기를 막는 답답함을 까부수고 싶었던 모양이다.


촛불의 파도는 광화문 성벽 옆에 쌓아 올린 플라스틱 벽에 부딪혔다. 1.17Km를 한 블록만큼 줄였을 뿐이었다. 우리 중 하나가 호기롭게 말했다. “저거 타 넘고 침투 한 번 해야 안 되겠냐”고. 그렇게 경찰을 조롱하고, 타락한 공권력을 비난하면서 생경했던 우리는 같은 추억을 쌓았다. 하지만 그 추억에 끝에는 내자동 사거리가 있다. 내자동 사거리에서 우리의 찰나 같은 반항은 끝났다. 우리의 의사표현을 할 수 없었던 아쉬움, 답답함은 그대로였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1조에는 집회를 할 수 없는 장소가 명시돼 있다. 이는 청와대 경계로부터 1백 미터 지점 만이 아니다. 국회의사당, 각급 법원, 헌법재판소, 그리고 이 곳 수장들의 공관과 국무총리 공관, 외교기관과 사절의 숙소다. 원래 논란의 대상은 청와대, 국회, 헌법재판소가 아닌, 외교관이었다.


당시 언론과 시민단체는 “외교관은 집회 금지를 통고하는 법적 근거로 활용되었다”고 주장했다. 2000년 <경향신문>에는 시청 인근 삼성생명일보빌딩에 주한 엘살바도르 대사관이 들어오면서 집회가 어려워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노조 설립 건으로 내홍을 겪고 있던 삼성이 시위를 막아보겠다고 벌인 ‘꼼수’가 아니었을까 삐딱하게 접근하고 있다. 하기사 아직도 삐딱하게 미 대사관을 “총독부”라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만 할 뿐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03년 집시법 내 외교관 관련 조항을 위헌으로 결정했다. 인근의 집회, 결사의 자유가 침해당한다는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 다음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방법, ‘위장집회’가 나타났다. 경찰이 집시법의 다른 조항을 이용해 대리인을 앞세워 위장집회를 신고하고, 열릴 예정이던 집회를 막는 방식이다. 기묘하다. 1.17Km의 거리를 놓고 벌어지는 줄다리기는 참 창의적이고, 참 쓸데없다.


적어도 1.17Km만큼 우리는 아직도 답답하다. 물론 그 거리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국가 안보, 행정 효율성, 그리고 공무 수행의 독립성 측면에서, 공무를 방해하거나 위력으로 겁박하는 것을 막겠다는 건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국가 기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의 원칙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주권자들이 분을 참다못해 청와대를 까부수자는데 공무 집행의 독립성 원칙을 운운하면 너무 외곬수가 아닌가. 1.17Km 뚜껑 지키겠다고 냄비 끓어 넘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아무리 스마트폰 시대라도 여전히 대화가 잘 되려면 거리가 가까울수록 좋다.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이며, 선출된 권력이 주권을 위임받았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라도 청와대는 북악산 밖으로 나와야 한다. 청와대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기관들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물리적 거리’를 좁혀야 한다. 그것은 민주공화국 수호를 요구하는 촛불의 요구이기도 하며, 끓어넘치기 직전의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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