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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1997년 9월 15일 | 날씨: 맑음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9. 14. 10:40

1997년 9월 15일 | 날씨: 맑음


진일석


1997년 9월 15일 am 11:00
"어디가 남쪽이야?" 지도는 언제봐도 어렵습니다. 윗집에 사는 미영이네는 가족들이 울진으로 오는데 울 할매는 대구에 있어서 차를 오래타야 합니다. 대구까지는 다섯 시간이 걸립니다.

2016년 9월 9일 금
"석아 추석에 대구 어떻게 가노?" 삼촌의 카톡. 이번 추석에도 분당에 사는 삼촌 댁에 가서 차를 얻어 타고 갈 것 같다. 이젠 책을 들고가도 짐만 되는 걸 알기에 가방에는 이어폰과 보조배터리만 챙긴다.

1997년
"한 번도 난 너를 잊어본적 없어. 오직 그대만을 생각 했는 걸" 지난 달 아빠를 졸라서 산 최신가요 테이프를 넣었습니다.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겠지만 끄닥끄닥 흥얼거렸습니다. 자다깨다 하다보니 북대구 톨게이트가 보였습니다. 고속도로를 나가는 왼쪽 산에는 '패션의 도시 대구'라고 적힌 하얀 간판들이 보입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꺼냅니다. 가방을 메고 회가 들어있는 아이스박스를 안았습니다. 벨을 누르니 인터폰에서 할머니의 "누구시오"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할머니가 부리나케 나와반겨주셨습니다. 울산에서 출발한 삼촌은 길이 막히는지 늦는다고 합니다. 거실에는 할머니가 부쳐놓은 함박스테이크와 찌짐들이 있습니다.

2016년
삼촌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하면 보통 엄마와 아빠는 먼저 도착해 있다. 할머니의 얼굴을 뵐 때마다 죄송스럽다.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셨었는데..이 핑계 저 핑계로 전화를 못했던 것들이 떠오른다. 그저 손을 꼭 잡아드린다. 최근 취업준비를 시작하며 마음의 여유가 없지만 온 이유도 마찬가지다. 1년에 사나흘로 죄송한 마음을 퉁치려는 내 자신이 가증스럽기도 하다.

1997년
우리 할아버지는 둘째 아들입니다. 큰 할아버지 댁이 상주에 있어서 내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제사를 지내러 가야합니다. 애들은 꼭 가지 않아도 되지만 매일아침 고민이 듭니다. 가면 어색한 육촌들과 어른들 사이에서 조금은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하고, 잠도 오는데 추운 새벽에 일어나야 합니다. 더 자고 싶기도 하지만 매번 혹시 몰라 받을 지 모르는 용돈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 양말을 꾸역꾸역 신고 가곤 합니다. 아마 내일 아침에도 갈 것 같습니다. 내일이 지나면 지루한 추석도 지나가겠지요.

2016년
서울-대구, 대구-울진, 다시 울진-서울. 언젠가부터 길바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아빠가 들으면 좀 서운할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6촌에 8촌까지 꼭 모여야하나 싶다. 문자 그대로 명절 당일에만 보고, 평소엔 연락도 하지 않는데 말이지(번호 자체가 없다) 힘들게 모이는만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사람끼리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어쩌면 명절은 해체되어가는, 아니 되어버린 대가족의 잔상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빠 나이가 되면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이번 추석에는 차에서 잠만 자지말고 로비를 해봐야겠다. 아빠를 설득해서 다음 명절에는 가족여행을 가든, 아니면 프로그램을 하든. 조금 더 즐거운 명절이였으면, 굳이 의무감 없이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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