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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브렉시트(Brexit), 삶은 계속된다

한결또바기 2016. 7. 6. 02:35

김정현




오늘도 한 외국인 노동자가 홍콩의 완차이 출근길을 걷고 있다. / 무료사진




#1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태어난 A씨는 작년부터 홍콩에서 살고 있다. K-POP을 사랑했고 홍콩에서 온 남자친구를 사귄 덕일까. 2012년에만 하더라도 극동아시아에 호기심 많고 마냥 밝은 대학생이었다. 올해 홍콩에서 다시 만난 그는 삶에 찌들어 있었다. 약혼한 남자친구는 취업은커녕 집에서 게임에 빠져있다. 기계공학 전문학교를 나왔지만 홍콩에는 일자리가 부족했고, 중국으로 나가기에는 부담스러워 한다고 했다.


A씨는 인문학 학사학위만 들고 고국을 떠났다. 스페인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유탄을 직격으로 맞은 나라다. 개중에도 A씨의 고향 안달루시아 지방의 절망이 깊었다. 다른 산업은 부족하고 주로 관광업으로만 먹고 살던 지방이라 2012년 청년실업률이 최대 50%에 달했다. 그는 홍콩에서 불안정한 고용상태의 임시직 스페인어 강사 자리를 구했다. 취업 비자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던 고용주는 말을 바꿨다. A씨는 추방자 신세에 놓일 위기에 처했다. 올해 초 직장을 옮기면서 비자도 얻고, 정규직 자리를 얻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현지 대학생과 교환학생으로서 함께 했던 시절, 그 때의 친구들도 세계로 흩어졌다. A씨의 어릴 적 가장 친한 친구는 스페인어 교육학 석사를 취득해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의 88만원 세대에 부합하는 스페인 식 표현이 ‘Ni-Ni Generacion’이다. 아무 것도 안 되고 없어서 ‘No-No’ 세대다. 스페인의 한 친구는 이민 또는 시위 둘 중 하나를 택한다고 자조 섞인 말을 했다. 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나라 중 하나가 바로 영국이었다. 브렉시트(Brexit) 전 통계에서 EU의 청년 실업률은 20%였다.


A씨는 불안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한다. 삶은 계속된다.




바르셀로나, Mercat de la Boqueria에는 한 유학생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 무료사진





#2 필리핀에서 태어난 B씨는 바르셀로나의 유학생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올해 6월 시 중심가 카탈루냐 광장의 한 식당이었다. B씨는 검은 치마를 맨 채 2층과 로비까지 뛰어다니느라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바텐더 일을 한다고 했다. 급여는 충분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는 다른 유럽 도시들에 비해 물가가 높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더욱이 부담스러운 것은 스페인에 만연한 인종차별이다. 


경제위기 시점부터 스페인에는 중국인 이민자가 부쩍 늘어났다. 이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시간대에도 상점을 열고 돈을 번다. 스페인에는 시에스타(Siesta)라는 문화가 있어 뜨거운 낮 시간대에는 상점들도 문을 닫고 사람들은 휴식을 취한다. 2010년 경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나 북쪽 지방은 시에스타를 폐지했다. 이 역시 경제위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국인들에게는 자연히 수전노 이미지가 붙었고, 시위가 일어나면 1순위 공격대상이 된다. 일부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한국인이건, 필리핀이건, 황색 아시아인이면 다 중국인이다. 바로 이곳 바르셀로나에서 4년 전 들었던 원숭이라는 욕설이 생생하다. 물론 예외는 있으니 일본인이나, 정장을 입은 아시아인에게는 대접이 다르다고 한다. 사람 사는 모양새란 어딜 가나 비슷하다.


정세는 갈수록 나빠진다. 특히 스페인은 2012년 이후 집권 보수당인 국민당(PP)과 진보 성향 사회노동당(PSOE)의 양강 구도가 깨지고 긴축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좌파 성향 포데모스(PODEMOS, “WE CAN”), 좌파연합(IU)이 급부상했다. B씨를 만난 날은 스페인 총선이 1주일 앞으로 다가온 날이었다. 작년 12월 총선의 재선거다. 단독 과반 정당이 없어 정부 수립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와 전해들은 총선 결과는 그대로였다. 역시 3당 구도에 단독 과반 정당이 없다. 브렉시트까지 겹치면서 정치 불안은 가중되고 있다.


함께 여행했던 아버지가 B씨를 불러달라고 했다. 따로 팁을 더 얹어주었다. 밝은 표정을 한 B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삶은 계속된다. 




파리의 지하철 통로를 걷다가, '이곳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 무료사진





#3 “나는 난민입니다!” 


파리의 지하철역 환승통로에 울부짖음이 울렸다. 남성은 불어로 쓰여진 종이 박스를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히잡을 쓴 여성은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곳은 샹젤리제 거리를 관통하는 파리의 핵심 노선인 1호선과 다른 노선을 잇는 환승통로였다. 파리도 퇴근시간의 지하철은 지옥철이다. 파리의 지하철 역마다 사람이 많은 곳에는 어디나 히잡을 쓴 가족들이 세 네 그룹은 꼭 있었다. 아마도 시리아 사람이지 않을까.


시리아 난민은 브렉시트 찬성 진영의 핵심 논거이기도 했다. IS와 정부군, 자유 시리아군의 내전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EU를 찾았다. 시리아 난민은 EU의 핵심 문제로 부상했다. 미국인 탐사보도기자 겸 프리랜서 칼럼니스트 마이클 와이스, 하산 하산의 탐사보도집 <알라의 사생아 IS>에 따르면 이는 세계의 잘못이다. 미국 정부가 부패한 시리아 정부를 도우면서 자유 시리아군이 약화되었다. 그 틈에 알카에다 태생의 IS가 부상하면서 내전이 장기화되었다. 미국의 중동 정책 실패가 IS와 난민을 만들었다. 난민은 EU의 골칫거리가 되었고, 영국은 난민과 EU를 박차고 나갔다.


파리 지하철역의 환승통로는 한국에 비하면 개미굴에 빗댈 만하다. 계단이 어지럽게 얽혀있고 통로는 세네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비좁다. 물론 핵심 노선들과 다른 노선을 잇는 통로의 경우 수백 명이 한꺼번에 움직일 만큼 크기도 하다. 언짢기만 하지는 않은 게 사람들도 왁자지껄하고 활기가 있다. 역시 파리 아니랄까봐 바이올린, 첼로를 들고 기악 독주를 하는 사람도 있다. 운이 좋으면 클래식 합창을 듣기도 한다. 회색빛 삶에 배경음악을 깔아준 감사 표시로 사람들은 유로 동전을 던져 넣거나, 멈춰서 음악을 듣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난민들이 있는 그 곳에는 오직 난민들의 울부짖음만 가득했다. 사람들은 말없이 빠른 걸음으로 그 곳을 떠났다. 


이들의 삶도 또한, 계속된다.



# 연재 / 2016 유럽과 브렉시트


1 브렉시트와 세 명의 삶

2 갇혀버린 에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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