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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77만 3600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7. 20. 10:55

 

77 3600

나는 어려서부터 잡지가 좋았다. 다른 매체에 비해 다루는 소재가 자유롭고, 일정한 틀에 얽매여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잡지 매체의 자유로운 성향은 필자가 자신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의견을 드러내야만 하는 일종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필자가 독자 앞에 당당하게 등장할 수 있는 환경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이유로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보다는 친밀하고 소화하기 쉬운 문체를 선호했고 읽는 재미 외에도 이미지 콘텐츠를 누리고 종이 질감을 느낄 수 있게끔 다양한 부분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렇게 잡지 기자는 기자보다는 에디터(Editor 편집자)’로 안착하게 되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우리 삶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잡지를 몹시 좋아했다. 미용과 패션, 한창 뜨고 있다는 식당이나 다이닝에 관해서는 영 잼병인지라, 삶의 방식에 대해서 혹은 우리의 작은 일상에 대해서 넌지시 보여주는 차분한 시선의 잡지를 좋았다. 이를테면 90년대 문화를 함께해 온 페이퍼(PAPER)나 가볍고 정갈한 생활 양식을 알려주는 킨포크(Kinfolk), 제주의 이야기를 나른하게 풀어내는 제주 인(Jiiiin)까지. 실은 수많은 잡지 시장에서 이러한 부류의 잡지는 많지 않았고, 그 중에서 지금의 X잡지를 알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과 같았다.

그리고 2016 12 21일 나는 운이 좋게 그곳에 입사를 했다. 꿈만으로 생각해 온 일을 업으로 삼고, 독자로서 접해온 잡지는 나의 직장이 되었다. 멋드러지게 회의를 하고, 취재를 하고, 원고를 쓰고, 탈고를 하고, 디자인을 보고, 검수를 하는 에디터이고 싶었지만 나는 겨우 어시스턴트(이하 어시)에 머물 뿐이었다. 그리고 내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한 달에 77 3600. 대학교 3학년 때 인턴으로 일했던 작은 청소년 잡지사에서 받은 돈이 80만원인 것을 생각하면, 4년 뒤엔 몇 만원 더 적은 돈을 받고 있었다. 내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실제로 잡지사에서 어시들에게 정당한 월급을 주지 않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보통 유명 패션지 어시들은 삼십만 원 가량의 급여를 받는다고 했고, 심지어 그 삼십만 원을 다 쓸 시간 조차 없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 어느 날엔가 대표님은 나를 방으로 불렀다. 어시스턴트 계약서를 쓰기 위해서였다. “보통 다른 잡지사에서 어시를 쓰면 삼십만 원 가량은 준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는 그게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팔십만 원을 주기로 했습니다. 3.3% 세금은 제하게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원하던 직장에 다니게 된 것에 대한 죗값으로 나는 다달이 77 3600원을 받게 되었다. 그건 매우 무거운 처벌이었다. 딸이 취직했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엄마에게 선뜻 선물을 사주지 못하고, 회사 몰래 투잡을 뛰었으며, 보고 싶은 영화는 조용히 막을 내리고 나서야 불법 다운로드를 받아 관람했다. 물론 이미 다수의 블로그와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줄거리와 결말은 누누이 알고 있는 채로. 이러한 참극에도 불구하고 더 비참했던 것은, 누군가 이 자리를 갈망해서 들어왔을 때, 그들이 이런 현실을 원치 않더라도 그들에겐 선택권이 없도록, 그러니까 이 계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 결국 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77 3600원의 선례이고, 이미 잘 수행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노동이 착취당하고 열정페이를 논하는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데 대한 억울한 성토를 올리는 고발이 아니라, 그런 현실에 아무 말도 없이 순응을 했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나 죄책감처럼 올라오곤 한다. 내가 꾸려놓은 자리가 누군가에게 갈등의 지평이 된다는 상상을 하면 그것은 더 할 나위 없이 미안함이 뜨겁게 솟아오른다.

내 명함 옆에는 이제는 에디터라는 나의 직함이 덧붙여져 있다. 멋드러지게 회의를 하고, 취재를 하고, 원고를 쓰고, 탈고를 하고, 디자인을 보고, 검수를 하는 에디터 말이다. 그런데 나는 가끔 남몰래 감춰온 범죄기록처럼 이 직함을 달면서 내가 거쳐온 어시 시절에 대해서 가끔 이상한 회의감이 올라온다. 최저 시급도 안 되는 급여를 주며 비인간적이지않으려 했다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응했을 때, 나는 비인간적이 되는 것에 동의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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