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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한국사회, 안중근을 다시 생각하다

한결또바기 2016. 5. 20. 14:32

©대한민국 정부


김정현

나의 어릴적 친구는 역사만화책이었다. 500년 조선왕조실록, 1000년 신라왕조실록 같은 것들 말이다. 또래들이 읽었던 드래곤볼과 원피스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였다.  머릿속에서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어떤 사람이 멋진 리더일지 따위를 헛되게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 때는 그런 책들이 청소년 권장도서였다. 또래들보다 역사 지식에 밝다는 것을 자랑삼아 했다. 사회 성적은 항상 만점이라며 으스대기 바빴다. 생각해보면 그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지도였다. 몇년에 최대 강역이 어디까지였다. 책은 그 때를 강국이라고 치켜세우고, 영토가 줄어든 시기는 나라가 망해가는 시기라고 강조했었다.

안중근을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안중근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데. 기억을 떠올려보면 다른 친구들도 안중근 정도는 성적과 관계없이 알아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일본의 독도-다케시마 도발이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물리 선생님은 수업을 하지 않고 간도와 만주가 한국 땅이 되어야 한다는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랬던 시기였다. 나 또한 환단고기에 입각하여 쓰여진 <백제왕조실록>이라는 책을 읽고 우리 땅이 더 넓었어야 했다고 느꼈다.

요 몇년 새 여론의 변화는 어쩌면 상전벽해와도 같다. 단 10년 전만 하더라도 나의 머릿속과 한국 전반의 정서를 관통하던 힘은 민족주의였다. AOA의 설현과 지민이 안중근을 긴또깡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 때였더라면 응당 대역죄였다. 2002년 월드컵은 우리 민족의 승리였다. 일본과 미국은 막연히 적대시했다. 우리 민족이 강하려면 뭉쳐야 하고, 승리의 역사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필수교양이었다. 그래서 분단 또한 영토의 관점에서 그림 그리듯 억울해했고, 북한은 나쁘니까 독재도 나쁜 것이고,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2009년 대학에 입학하고, 내 역사인식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연결고리가 모호하게 맞춰져 있던 지식들의 인과관계를 스스로 채워나갔다. 어려워서 권하지 않던 책 속에 답이 있었다. 파시즘은 무엇이고, 어떻게 생기게 되었고, 어떻게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을 읽었다. 현실 속에도 답이 있었다. 뭉치는 게 무조건 좋은 게 아니었다. 리더의 독단이 오히려 파국을 부른다는 사례를 체험했다. 광주에서 죽은 개개인의 숨겨진 이야기를 새로이 들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주민들을 학살한 사실도 <한겨레>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결국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현과 지민의 논란을 보면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떠올렸다. 지금 나는 설현과 지민의 무지를 꾸짖는 것이 잔인한 일이고,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소견을 갖 됐다. 다른 독립 투사들은 모르면서,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것을 난도질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의 맥락에 공감한다. 한편 이런 맥락을 언론에서 담론으로 제시할 만큼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도 느낀다. 그럼에도 아직 안중근 의사의 사진에 대한 지식을 성역으로 생각하는 무의식이 남아 있다는 것도 생각한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것일까. 또 이 변화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까. 과거와 현재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심사숙고할 수 있는 문화가 자리잡아가는 것일까? 안중근을 모르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고민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아니면 분노와 분노의 충돌일까? 민족 관념과 국가에 대한 분노가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사회가 어제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진실을 알리고 알려는 수많은 개개인의 노력이 있었다. 지식의 바벨탑을 쌓아두고 남들의 무식을 꾸짖고 비하하는 오만함이 아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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